
W. 세령

돗포는 손에 들린 조금 커다랗고 긴 네모난 상자를 내려다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외근 나갔던 병원의 직원이 억지로 떠넘긴 물건인데, 나쁜 물건이냐 하면 그것은 아니었다. 그저 단지 이것을 들고 사무실로 돌아가면 상사들이 잔소리를 할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래처에서 준 물건을 제멋대로 처리하기도 곤란하여 우선은 사무실로 들고 들어가기로 했다. 날은 춥고 바람도 쌩쌩 불고 그런 와중에 가방에 머플러까지 무척이나 정신없는데 손에 들어야 하는 짐까지 있으니 정신이 쏙 빠지는 느낌이었다. 잔소리도 잔소리지만 우선 사무실로 가서 몸이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걸음을 빨리 했다.
사무실에 돌아가니 아니나다를까, 상사들이 상자 속의 물건을 보고서 잔소리를 했다. 제가 사온 것도 아니고 선물이랍시고 준 것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말을 하다니, 하며 조금은 서러워졌지만 원래 윗사람에게 치이는 것이 아랫사람의 일이거니 하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머리를 숙였다.
한참을 시달리다 자리로 돌아온 돗포는 여전히 책상에 자리잡은 그 상자를 내려다보며 골똘히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내 상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걸어갔다. 이걸 둘만한 공간으로 떠오른 곳이 이 곳 뿐이었다.
돗포는 탕비실 한쪽에 놓인 테이블에 자리잡고 앉았다. 어차피 퇴근시간이 지나서 이제 저를 찾는 사람은 딱히 없었다. 일부러 그리 들어온 것도 아니건만 사무실에 돌아온 시간이 퇴근하기 30분쯤 전이었다. 아마도 상사들은 그래서 더 잔소리를 하지 않았을까. 외근 나가서 받아온 선물이 하필 저 모양이라 놀다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해서. 저들은 정말 놀고 오는지 몰라도 자신은 그렇지 않은데, 하고 생각하다가도 작게 한숨 한번 쉬고 들고 들어온 상자를 열었다.
상자는 길이가 대략 50센티 정도는 되었다. 옆구리에 한 팔로 끼면 공간이 넉넉할 정도의 굵기였고. 그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상자보다는 많이 짧은 푸릇푸릇한 초록색의 이파리가 달린 플라스틱 나무였다. 가장 굵은 기둥은 얇은 쪽이 두꺼운 쪽으로 접혀 들어간 모양새라 그것을 잡아 꺼내서 고정시켜주고, 굵은 기둥쪽으로 접혀 붙어있는 가지들을 펴고 이파리를 정돈해주자 제법 나무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아래쪽에 달린 발을 펼쳐 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하자 혼자서도 꼿꼿하게 잘 서있었다.
드디어 그것에서 손을 뗀 돗포가 상자를 뒤집어 탈탈 털자 작은 봉투가 하나 떨어졌다. 봉투를 열자 안에서 이런저런 소품이 나왔다. 초록색과 빨간색의 구슬이 엮인 긴 장식 줄, 산타 얼굴이나 산타 모자, 선물상자 모양의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밀 수 있는 오너먼트들이었다.
초록색과 빨간색의 구슬이 엮인 줄을 열심히 펼쳐둔 나무, 트리에 적당한 간격으로 둘둘 감고서 곳곳에 오너먼트들을 하나씩 달았다. 있는 것들을 죄다 트리에 올려놓자 테이블에는 이제 조명이 붙어있는 줄만 남아있었다. 그것을 구슬이 엮인 줄을 트리에 둘렀던 것처럼 감아주자 얼추 크리스마스 트리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긴 조명 끝에 달린 건전지 홀더에 건전지를 끼우고 스위치를 올리자 조명에 반짝반짝 빛이 들어와서 제법 분위기가 났다. 물끄러미 트리를 바라보던 돗포가 어질러진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외근 나갔던 동안 쌓인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연말이라 회사 안팎으로 일이 정말 많았다.
★☆★☆★☆★☆★☆
“어?”
돗포는 컵에 물을 받고 돌아선 채 그대로 멈춰섰다. 탕비실에 있는 트리는 위치는 그대로였으나 모양새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지난 금요일에 트리를 설치하고 주말이 지난 지금, 트리에 무슨 변화가 생겼는고 하니, 우선 구슬이 달린 줄과 조명이 제가 감아둔 것보다 조금 더 트리에 달라붙도록 감겨있었다. 어제 자신은 스스로 생각해도 제법 엉성하게 감아두었는데 오늘 보니 조금 더 가지에 달라붙어 나무에 장식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다시 감아둔 모양이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트리 아래에 낱개 포장된 초콜릿을 잔뜩 쌓아두었다. 과자나 초콜릿, 사탕 같은 것은 탕비실에도 제법 있었지만 이건 탕비실에서 본 적 없는 것이었다. 꼭 크리스마스 트리 밑에 포장된 선물을 쌓아둔 걸 미니 버전으로 보는 느낌이라 돗포는 속으로 조금 웃었다.
“허.”
또 하루가 지난 오늘. 오늘도 역시 트리에 변화가 있었다. 상자에서 꺼내 달아둔 오너먼트 몇 개가 사라지고 제가 본 적 없는 오너먼트와 리본 장식이 추가되었다. 사무실의 사람들이 이것저것 가져와 장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트리 아래에 탕비실에서 본 적 없는 작은 과자가 몇 개 있었다. 각 봉지별로 맛이 달라서 그런지 그 사이를 헤집은 흔적도 있는 것이 이미 여러명이 이 작은 선물을 챙겨간 모양이었다.
“흐음.”
트리를 설치한 지 일주일 째. 돗포는 이제 관찰을 하고 있었다. 머그를 입에 댄 채 그 안의 물을 넘기며 보고 있자니 첫날 자신이 꾸며둔 것보다 훨씬 트리같은 모양새였다. 작은 방울 장식이나 반짝이는 장식이 늘어났고 제가 달아둔 오너먼트들 중 몇 개가 또 사라졌다. 사무실 직원들이 회사에서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방식인가, 하며 생각했다. 여전히 오늘도 작은 선물이 트리 아래에 있었다.
★☆★☆★☆★☆★☆
다시 돌아온 금요일. 한 주를 마무리 하는 날이기도 하고 이제 다음 주면 정말 연말이라 오늘 마무리 해야 할 일이 엄청 많았다. 거래처에 크리스마스와 연말, 새해 인사를 해야 하고 연하장도 보내야 하고 연초의 긴 휴가에 생길법한 사고들에 대비하기도 해야 했다. 식사를 하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였다. 탕비실에 들를 시간은 당연히 없었다. 트리 생각을 할 여유가 없기도 했고.
잠깐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고개를 든 순간, 늘 자신을 혼내는 대머리 부장이 손바닥만 한 작은 봉지를 들고 탕비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언제나 부하직원을 시켜 무언가를 가져오게 하는 사람이 웬일로 스스로 가는 것을 보니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으나 이내 통화에 집중했다.
전쟁같던 시간이 흐르고 얼추 해야 할 일을 모두 정리한 후, 퇴근을 하려 자리에서 일어나자 오늘도 사무실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나서는 것은 돗포였다.
축 쳐진 어깨에 가방끈을 메고서 사무실을 나서려다 말고 잠시 탕비실을 바라보았다. 어둑한 사무실 너머에서 희끄무레하게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자 곧 발길을 그 쪽으로 돌렸다. 건전지가 꽤 오래 간다고 생각하며 트리를 바라본 돗포가 조금 눈을 크게 떴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없던 것이 트리에 달려있었다. 트리 꼭대기에 밝게 빛나는 별이 있었다. 샛노란 별은 손바닥 정도의 사이즈였는데 표면에서 반짝반짝 광이 나서 꽤 예뻤다. 은근히 트리와 어울리기도 했고. 화룡점정으로 올라앉은 별을 보던 돗포가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찰칵 찰칵 몇 장을 찍고 나니 퍼뜩 생각이 들었다. 부장이 손바닥만 한 작은 봉지를 들고 답지않게 직접 탕비실로 들어가던 장면이. 윽, 잠깐 흐린 눈이 된 돗포가 그래도 예쁜 건 예쁜 거라고 생각하며 트리 아래를 보자 초콜릿과 캐러멜, 사탕들과 함께 작은 쿠키가 몇 개 든 채 예쁘게 포장된 봉지가 보였다. 겉면에는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적힌 것이 부서 내의 누군가가 크리스마스의 흥에 취해 준비해서 놓아둔 것 같았다. 용케도 제 것이 남았다고 생각하며 집어들다 트리를 쳤는데 방울 장식이 딸랑 딸랑 귀여운 소리를 냈다. 돗포는 놀라서 잠시 굳었다가 트리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마지막으로 퇴근하는 제게 인사 하는 것 같아서. 돗포는 달달하고 작은 선물을 주머니에 챙겨넣은 후, 손가락으로 괜히 별을 한 번 툭 세게 튕기고는 씩 웃고 발을 돌렸다.
작은 트리에 매달린 방울들의 딸랑 딸랑 소리가 돗포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하는 것 같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