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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좋아하는 취미는 없지만 티그리디아만큼은 내 마음에 드는 유일한 꽃이다. 비밀을 집어삼킨 듯 새빨간 꽃, 누군가 티그리디아의 꽃잎을 내 머리카락 색과 닮았다고 말하던 기억이 난다. 목소리는 하나의 바람이 되어 이따금 내 귀를 파고 들어가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처럼 사라진다. 그리운 목소리, 그때부터 티그리디아를 마음에 들어했던 거야. 지금은 꽃 한 송이 키울 수 없는 곳에 나 혼자 담겨있다. 너 존재 자체가 꽃이야. 다른 꽃을 뭐하러 사? 꽃을 사게 해달라고 부탁하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대답이다. 무대 위에서 손을 뻗을 때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피어나는 새하얀 꽃, 다리의 근육을 찢어발기는 듯 혹독한 연습을 거치고 나면 종잇장같은 다리에 군데군데 물든 피멍은 핏빛의 꽃, 나의 존재 자체가 꽃… 그러면 내가 죽으면 시들어버리겠지, 죽는다고 표현할 수 없다. 나는 꽃이니까. 활짝 피었다가 단명하는 꽃.

 

 

 

    

필터를 입에 물고 숨을 들이쉬자 돛대는 순식간에 타오른다. 독한 냄새가 금세 퍼진다. 라이터는 겉옷 주머니에 넣고 텅 빈 담배갑은 아무데나 던졌다. 담배갑을 구길 힘조차 남지 않은 지금, 벽에 간신히 기대 서있는 것조차 신기할 지경이다. 몇시간을 쉬지 않고 연습에만 몰두한 결과가 이거다. 땀냄새가 담배 냄새에 섞여 밑에서부터 올라온다. 존나 찝찝하다…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헝클였다.

하루는 24시간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그 24시간 중에서 적어도 12시간은 연습에 투자할 정도로 연습량은 혀를 내두를 수준이었다. 그만큼 연습하고나면 벽에 기대어 서는 것조차 힘들어져, 벽에 기대어 서있다가 습관처럼 쪼그려 앉았다. 발밑에서 아킬레스건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는 감각이 느껴진다.

이 몸이 널 예뻐하지만 버릇없이 굴면 그 발에 근육부터 끊어버릴 거야. 계속 발레를 하고 싶으면 처신 잘해.

그 말은 거짓말이다.

그가 무엇보다 좋아하는 건 나의 발레다. 나의 발레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내 다리에 돋아난 피멍을 “핏빛 꽃”이라고 부르던 게 그 사람이다. 발가락 관절 하나하나 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던 내가, 걷는 것조차 힘들어 동료에게 줄곧 업혀다닐 때, 무대에 오르기 직전 통증을 잊기 위해 발가락 사이에 생고기를 끼우고 무대에 섰던 그 날, 하얀 토슈즈를 물들인 선홍빛 핏물을 보고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았던 걸까, 하기야 그만한 통증이라면 보통 사람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오열하며 어딘가로 실려갔겠지… 그는 고깃덩이로 더럽혀진 토슈즈와 완전히 짓뭉개진 내 발을 보며 “그런 상처야말로 예술가의 상징 아니겠어? 근사한데.” 언제 그랬냐는듯 역겨운 말을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여유로운 말투로 줄줄 읊는다.

그러더니 나의 발레를 오랫동안 보고 싶으니 내 온몸에 보험을 들겠다고 말했다. 팔과 다리, 발, 손가락, 얼굴의 눈, 코, 입… 그 사람 앞에서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상처로 인해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내 발을 손으로 쓸어보며 “이 발부터 새 걸로 갈아끼우면 좋을텐데. 인형처럼.” 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그였다. 그의 앞에서 나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살아있는 존재로 남아있을 수 없다.

발레를 시작한지 몇 년 안 되었을 때, 내 발이 짓무른 걸 본 친구는 내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발레를 시작하는 것을 권유했던 소꿉친구였다. 친구 역시 발레를 공부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발레리나를 비롯한 모든 여자를 병적으로 두려워하여 그만두게 되었다. 연습이 시작되면 눈빛부터 진중해지는 친구였는데… 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긴 발의 상처를 그 친구는 마치 제 발의 상처인양 진심으로 괴로워했다. “나 때문이야, 내가 돗포한테 발레를 하자고 졸라서 돗포가 아픈 거야.” 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숨 쉬는 것도 잊을 때까지 하염없이 울었다… 그런 다정함을 좋아했던 것 같다. 나에 관한 일을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기뻐하고 슬퍼해주는 그런 다정함. 내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날, “돗포~ 진짜 잘됐잖아! 앞으로 사소한 걱정 할 일도 없이 발레만 할 수 있겠어!” 라고 하며, 우리가 떨어져 지내는 것에 대한 염려는 접어둔채 나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던 친구의 다정함을 좋아했던 것 같다.

친구한테 고맙다고 좀 더 자주 이야기해줄걸, 후회한들 소용 없었다. 이 곳에 온 뒤로 친구의 소식은 일절 들을 수 없었다… 꽃 한 송이조차 키우지 못하는 절제된 지옥이다.

담배를 더 피우고 싶다. 이런 연습에 시달리고나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멍청하게 앉아 담배를 태우는 일 뿐이다. 새로운 담배는 연습실에 있었다. 발에서부터 머리 위로 거슬러오르는 통증에 옴짝달싹못하고 그 자리 그대로 앉아있자니 그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는 눈대중으로 훑어도 분명 비싸보이는 수트와 반짝이는 시계를 손목에 찬 채로 내 앞에 섰다. 눈이 쌓인 것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에 새빨간 눈동자, 미의식이라는 걸 갖지 않은 사람이 봐도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동료들에 비해 훨씬 작고 왜소한 나보다도 훨씬 발레에 적합해보이는데… 그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는 기분 나쁜 빛을 낸다. 백열등의 빛을 받으면 마치 사치 부리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의 값비싼 보석처럼 불쾌하게 빛난다. 저 불쾌한 빛에 홀리던 때가 있었다. 맨눈으로 빛을 봤다간 눈이 멀어버릴 것 같아 고개를 돌리면, 그는 기다렸다는 듯 질척한 웃음을 흘리며 내 시선을 뺏어간다. 내 마음과 생각을 모조리 꿰뚫고 있다는 듯 질척한 웃음에 기만에 가득 찬 말투, 귓속에서 달콤하게 감기는, 쓰레기 같은 말들. 언젠가 그는 오랜 연습으로 인해 땀에 절은 내 손목을 붙잡으며 “네 감성을 사고 싶어. 얼마가 됐든지간에 상관없이.” 라고 말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의 설탕 발린 말과 불쾌한 빛에 이끌려 내가 가진 모든 걸 그에게 팔아넘겼을 뿐이다.

그래, 그뿐이다.

“한참 찾았잖아.”

그가 처음으로 한 말은 그것이었다.

“잠깐 쉬러 나온 건데요…”

“쉬는 걸 갖다가 타박할 마음은 없어. 내 말은… 제대로 이야기 해달라는 거야. 넌 내가 안 보는 사이에 금방이라도 도망갈 것 같아.”

이 말 또한 거짓말이다.

그 말은 나에 대한 기만이었다. 발레로 인해 내 몸과 정신이 어떤 형태로 망가지고, 부러지고, 썩고, 곪아가고, 문드러지는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내 바로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봐왔으며, 오히려 내 몸이 망가지는 것을 종용한 것은 그 사람이다. 인형이었더라면 고칠 수 없을만큼 망가져 버려야만 하는 게 지금의 내 몸이다. 그는 왜 나를 이 곳에 데리고 온 걸까, 나는 꽃 한 송이 키울 수 없는 절제된 지옥에서 오롯이 그를 위해 춤을 춰야 했다. 오르골에 장식된 발레리나 인형도 나보다는 더 독립적으로 살아갈 것 같은데. 뼈마디가 시큰댄다. 그는 내 발치에 버려진 담배갑을 보며 미소를 띠었다. 예전에 보았던 그 질척한 미소.

“소브라니 담배라니 꽤 하잖아?”

“네, 뭐…”

“이몸은 소싯적에 멘솔만 피웠지. 가진 거라곤 그야말로 푼돈밖에 없었던 때가 있었어.” 그는 그 말을 하며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선다. “내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세상이었지. 엿같았어. 수중에 칼이 없으면 피우고 있던 담뱃불로 남의 손이라도 지져야 목숨은 건졌거든.” 그는 내가 버린 담배갑을 집어들더니, 보기 좋게 그것을 구겼다. 담배갑은 그의 손 안에서 형체를 잃고 처참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오롯이 내 힘으로 지금 자리에 올라온 거고… 네녀석이 피우는 담배의 회사 정도는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됐어.”

그가 내 옆에 서있을 때면, 그의 기분 나쁜 향수 냄새가 온 감각을 마비시킨다. 맡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만큼 달콤한 향, 분명 바닐라 향기였던 것 같다. 내 몸을 감싸던 담배 냄새도, 눅눅한 땀냄새도 모두 사라지고 그의 향수 냄새만이 퍼지고 있었다. 하얀 천에 물을 엎지르면 물이 천천히 스며들어 천을 적시는 것 같은 그런 감각이었다. 요며칠 입에 댄 거라곤 물과 담배 뿐이었지만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난다. 내 생각을 다 꿰고 있다는 듯, 나같은 놈 하나를 정부로 들이는 건 일도 아니라는 듯한 그 미소, 신사적인 척, 상냥한 척, 나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척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오만에 가득 차 있었다.

“케이크 먹으러 가자.”

“갑자기 무슨…”

“너 며칠동안 물만 먹은 거 다 알아. 그런 몸으로는 절대 발레를 할 수 없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안나 파블로바를 알아?”

“발레리나… 말씀이신가요?”

“그렇지, 역시 잘 아네.”

“……”

“네녀석은 파블로바를 닮았어. 쓸데없이 약해빠진 몸부터, 힘 주면 부러질 것 같은 발목 같은 게 말야… 파블로바가 공연을 위해 호주에 갔을 때, 호주의 사람들은 파블로바를 기다리며 케이크를 만들었지. 그 여자의 이름과 똑같은 케이크를…”

그는 뒤이어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 듯 입술을 깨물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를 닮은 케이크를 잘 만드는 가게를 알아.”

“죄송하지만, 오늘은 몸이 좀 안 좋아서, 같이 가긴 좀…”

순식간이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얼굴에 어린 웃음기가 씻은 듯 사라지더니 보기 좋게 뻗은 커다란 손으로 내 뺨을 내리쳤다. 너무 강한 충격에 내 몸을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고 그대로 쓰러져버린다. 누가 봐도 한심한 꼴이다. 그의 웃음기 없는 눈 위로 치졸한 소유욕이 아른거린다. 나는 이 사람을 잘 안다. 자기 소유의 인형이 말을 안 듣고 제멋대로 하는 꼴을 못 봐주겠다는 거겠지. 어린 애의 투정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달리 내 몸은 두려움에 찬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의식의 깊은 곳에서 물기를 머금은 공포가 기어오른다.

“나한테 무례하게 굴면 안되지. 그치? 돗포?”

대답할 수 없다. 위액이 올라오는 감각에 입을 굳게 다물고 마른 침을 삼키려 하자 그가 다시금 내 뺨을 내리쳤다. 귀가 울릴만큼 얼얼한 고통. 입안에서 비린 피가 느껴진다.

“대답해.”

대답 대신 없는 힘을 쥐어짜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야 만족한 듯 다시 그 질척한 미소를 띤다. 병신새끼, 쓰레기같은 새끼, 지독한 새끼. 두 번을 맞아 새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식히며 침을 뱉었다. 입안에 고인 피와 두려움이 침에 섞여 나온다.

“연습실로 돌아가. 정리하고, 준비하고 나와. 내가 사준 옷 있지? 예쁘게 하고 와야 해.”

“사마토키 씨, 저 정말 못갈 것 같아요. 움직이기 힘들어서…”

“뭐? 이거 웃기는 새끼네. 내가 지금 그 말을 들으려고 여기까지 온 거 같아? ‘사마토키 씨’? 참 웃기는 호칭이네 그거. 어제 침대에선 내가 말 안 해도 알아서 말 놓지 않았나?”

끈적하게 들러붙은 땀이 식고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땀이 식어서 그런걸까, 아니면 수치심 때문일까. 사실은 잘 모르겠다… 시선을 발밑으로 거두었다. 여기서 사마토키의 눈을 마주 보면 그때는 정말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내가 발레를 하는 이유와, 친구를 버리면서까지 이 곳에 온 명분이며, 내 존재의 의의같은 것들이, 모두 무너질 것 같아서…

“파블로바는 널 닮은 케이크니까 분명 마음에 들어할 거야.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니까 어서 돌아가.”

좀전까지만 해도 무섭게 내 뺨을 내리치던 손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하게 내 뺨을 감싼다. 나는 점점 형체를 잃고 있었다. 머지않아 내 발의 파츠는 헌 것에서 새 것으로 바뀔 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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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석영

Bach - Cello Suite No.5 i-Prelu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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