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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KAIN

달걀에다 설탕, 박력분 밀가루와 바닐라 익스트랙, 무염 버터와 우유, 그리고 생크림까지. 돗포는 제 앞에 놓인 재료들을 천천히 훑어보다가 엣취! 재채기를 크게 했다. 공기 중을 떠다니는 밀가루 때문인지 코가 맹맹하니 간지러웠다. 게다가 며칠 잠을 못 잔 사람처럼 눈이 감기기도 하고 걸핏하면 다시금 재채기가 터져 나올 것 같다. 그에 몇 초간 허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옆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돗포는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곤 조금 아연실색한 기색으로 저보다도 키가 큰 상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저…… 정말 괜찮을까요?”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한 부엌과 평소 볼 일이 없는 재료와 도구들. 난생처음 맡아 보는 유제품의 향기며 낯설고 생경하기 그지없는 현 상황이 그를 더 움츠러들게 했다. 반면 돗포의 어깨가 굳어질수록 그 옆에 나란히 선 이의 미소는 더 짙어져만 갔다. 잘 빗어넘긴 머리, 이지적인 안경 그리고 그 너머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 같은 날카로운 눈매의 소유자. 요코하마의 경찰관이자 무엇보다도 돗포를 이곳으로 데려온 장본인인 이루마 쥬토가, 평소와 다름없이 멋들어진 차림을 한 채 돗포의 곁에서 눈매를 곱게 접으며 되물었다.


“뭘 걱정하시는 거죠?”


가까이서 들으면 귀가 간지러워질 만큼 은근하고도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돗포는 그에 얼굴 근육에 마비라도 온 듯 어색하게 아하하 하고 따라 웃었다. 그리곤 자칫했다간 바로 입 밖으로 쏟아져나올 것만 같은 불만들을 열심히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너요! 네가 제일 무서워요, 이 불량 경관!! 

생각해 보면 볼수록 지독한 악연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유독 사회초년생 때의 돗포는 스스로를 불운의 아이콘이라 부를 만큼 툭하면 불심검문에 자주 걸리던 타입이었다. 게다가 무슨 우연인지 그중 열에 아홉 정도는 검문을 걸어온 상대가 당시 순경이었던 이루마 쥬토이곤 했다. 같은 나이에다 생일 날짜도 비슷했기에 조금 경계가 느슨해진 탓일까, 아니면 그때도 유독 눈길을 휘어잡았던 상대의 잘난 얼굴 때문일까. 마주칠 때마다 종종 회사 얘기를 꺼내기도 하고 캔커피도 주고받는 둥, 저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던 돗포는 결국 어느 날 밤 이루마 쥬토와 함께 술을 마시고 그대로 선을 넘고 말았다. 

그런 관계 진전까지는 바라지 않았을 텐데. 그저 각자 위치에서 남들은 잘 알지 못 하는 불평불만들을 나누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안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알코올에 취해 이성을 날려 보낸 채 마치 노리고 있던 것처럼 몸을 섞다니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돗포는 지금도 그때의 충동을 정의 내릴 수 없었다. 다만 젊은 날의 치기라고 하기엔 너무도 명명백백한 원나잇이자 하룻밤 실수였고 또 돗포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첫 경험이기도 했다. 새벽에 옷가지를 챙겨 들고 허겁지겁 도망치듯 호텔을 빠져나올 때의 섬뜩함을 그는 아직도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기억했다. 그때만 해도 다시는 이 사람을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디비젼 랩 배틀에서 우연처럼 다시 마주치면서 잊고 있었던 끈질긴 인연이 재개되기 전까지는.


“그게, 과연 제가 이런 곳에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서… 아, 아하하….”


침착하게,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얼굴에 철판을 깐 듯 뻔뻔하게. 필사적으로 그날 밤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면서. 여차하면 그대로 줄행랑치기라도 할 것 같은 자세로 돗포는 영혼 없이 둘러댔다. 사실 절반 정도는 진심이 녹아든 말이었다. 그야 돗포 본인조차 주말 오전에 이루마 쥬토의 집 부엌에 서서 자신이 뭘하고 있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는 거리를 걷고 있었을 뿐이었다. 봄이 무르익은 5월의 둘째 주, 그리고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늘 같은 주말에도 출근을 하고 있는 자신의 팔자를 한탄하면서. 남들은 지금쯤 실컷 늦잠을 자고 있을 시간이겠지. 빌어먹을, 날씨는 왜 오늘따라 좋고 난리람? 같은 저주를 속으로 실컷 퍼붓고 있기도 했다. 그러다 돌연 제 앞에 멈춰 선 값비싼 차량에 놀라 돗포는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왠지 모르게 그때부터 이미 나쁜 예감이 등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싶더니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불운의 아이콘인 자신이 또 한 건 해내고 만 셈이었다. 좀 더 통찰력이 있었더라면, 차창이 내려간 운전석에서 낯익은 얼굴이 고개를 내밀었을 때 오늘 일진이 한참 꼬이리란 사실을 짐작하고도 남았을 텐데.


‘좋은 아침입니다, 칸논자카 씨.’
‘힉, 이루마 씨…! 아… 그, 네, 안녕하세요.’
‘마침 잘됐군요, 잠깐 시간 좀 내주셔야겠습니다.’
‘예?!’


하지만 주말 출근길에 경찰과 마주쳐서 갑자기 조수석으로 끌어 당겨지더니 다짜고짜 그대로 요코하마까지 강제동행당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동하는 내내 좌불안석인 상태로 돗포는 서류 가방을 목숨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고 벌벌 떨기만 했다. 설마 체포당하는 건가, 그동안 자신이 대머리 과장에게 품고 있던 악의 및 살의가 어떤 형식으로건 경찰에 들통나기라도 한 것일까. 무슨 죄목으로 잡혀가는 거지? 살인 음모죄? 그런 걱정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정작 차에서 내리자 발을 디딘 곳은 경찰서가 아닌 이루마 쥬토가 사는 맨션 부지 안이었다. ……이런 곳으로 데려오다니 이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못내 의심스럽긴 했지만 도착한 곳이 유치장 안이 아니란 사실에 내심 안도하며 돗포는 줄레줄레 쥬토를 따라갔다. 물론, 최종 목적지인 부엌에 도달했을 때 ‘그럼 지금부터 케이크를 만들어 보도록 하죠.’라는 말을 듣고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지만.


‘네에?!?!’


그리고 그의 당황과는 판이하게, 상황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정신 차려 보니 돗포는 어느새 흰색 앞치마에 팔을 꿰어 넣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눈앞에는 처음 보는 베이킹 재료 및 도구가 순식간에 주르륵 놓이기 시작했다.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조금 속이 울렁였다. 처음 와보는 곳이라 시각적으로 그리고 후각적으로도 낯설고 불편해서 좀처럼 적응이 잘 되질 않는 탓이었다. 물론 너무 상냥해서 되려 무서운 제 옆의 이루마 쥬토는 따로 말할 것도 없이 적응에 도움이 되질 않았다.


“칸논자카 씨, 제 정보에 의하면 크레이프 케이크를 좋아하신다던데 맞습니까?”
“마… 맞긴 한데 그걸 대체 어떻게…?”
“좋아하신다니 다행이군요. 그럼 오늘은 그걸 만들어 볼까요? 이왕이라면 좋아하는 케이크를 만드는 편이 당신도 더 의욕이 솟으시겠죠.”


아뇨, 저는 세상 모든 일에 의욕 제로인 사람인데요. 그보다 갑자기 케이크는 왜 만드는 거죠? 금방이라도 그렇게 항의하고 싶은 돗포였지만 막상 이루마 쥬토의 완벽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마주 보자 따지려던 의지가 다소, 아니 대폭적으로 꺾이고 말았다. ……윽. 하여간 대항해야 하는 상대가 미인이어선 자신이 일방적으로 너무 불리했다. 시선이 마주치면 심장이 멎는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눈 한 번 마주 보기가 왜 이렇게 힘든 건지 나 원 참. 끝내 큰 한숨을 쉬고 만 돗포는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두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곤 괜히 입고 있던 앞치마 끝을 양손으로 꾸욱 쥐었다 펴며 물었다. 대놓고 따지는 게 불가능하다면 사회인답게 에둘러 설득하는 방법을 써야 할 터였다.


“그보다 케이크라니… 정말 저로 괜찮으신 건가요?”
“구체적으로 뭘 걱정하고 계신지 설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제 말은 그… 곧 서른 줄에 접어드는 저 같은 아저씨가 이런… 한심한 꼴로 부엌을 헤집어놔도 괜찮으시냐는 거예요. 말해 두지만 전 요리도 못 하고 베이킹은 시도조차 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잘은 몰라도 분명 이루마 씨 집이 엉망진창이 될 거라구요.”


그렇다. 이런 빼빼 마르고 사회에 찌든 회사원에게 흰색 앞치마라니, 그야말로 언어도단이다. 그런 수치심에 젖은 돗포는 두 눈을 부릅떴다. 사실 지금의 그에게는 쥬토가 자신을 다짜고짜 여기로 끌고 온 이유나 갑자기 케이크를 만들어야 하는 황당한 사실보다도, 앞서 생각해야 하는 중대한 포인트가 있었다. 지금부터 자신이 남의 부엌에서 얼마나 처참한 민폐를 끼쳐 상대를 곤란하게 만들지 그 과정보다는, 대체 어떻게 뒷수습을 해야 하는지가 더 중요하고도 금전적으로 치명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번 달도 월급은 그의 통장을 스치고 사라졌다. 그런 와중에 오늘 뭔가 사고를 쳐서 이 사람한테 손해배상이라도 해야 한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큰일이었다. …게다가 이 사람 뭔가 비싼 것들만 잔뜩 사둘 것 같은 이미지니까. 애초부터 이런 류의 사람을 불편하게 할 만한 일은 극구 사양해두고 싶었다. 그리고 역시 도로 출근하게 해줘! 라고 외치고 싶다. 그러나 구구절절 늘어놓은 설명 끝에 돗포에게 돌아온 건 너무도 해맑고 눈부신, 이루마 쥬토 특유의 황홀한 미소뿐이었다.


“아, 그 건이라면 괜찮습니다.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베이킹은 처음이니까요.”
“……전혀 안 괜찮은 것 같은데요?”
“그럼 우선 시작 전에 손부터 씻을까요?”
“이루마 씨, 지금 제 말 일부러 안 들리는 척 하시는 거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퉁명스러운 말을 던졌지만 쥬토는 끝내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에 자포자기하듯 손을 씻기 위해 돗포는 얌전히 소매를 걷어 올렸다.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그날 밤, 새벽에 이 사람을 버려두듯 뒤로하고 호텔을 뛰쳐나왔던 과거가 자꾸 생각났다. 그 시절 이 사람한테 폐를 끼친 것도 맞고 여러모로 도움을 받은 것도 있으니 웬만한 요구에는 어울려줘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이 있긴 한데…. 대체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일까. 저 화사한 웃음 아래 숨겨진, 이루마 쥬토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돗포는 점점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 * *

 


그나저나 잘할 수 있을까. 뭔가를 부수거나 망가트리거나 더럽히거나 혹은 오염시키면 안 될 텐데. 돗포는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깨끗하게 씻고 잘 말리기까지 한 양손을 사이좋게 위로 들어 올린 채 쥬토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 뭐부터 하면 될까요?”


마치 수술 준비를 마친 의사와도 같은 비장한 자세였다. 금방이라도 메스를 건네 달라고 진지하게 요청할 것만 같다. 쥬토는 그런 돗포를 보자마자 당황하여 반응이 한 박자 늦고 말았다. 그러나 곧 자연스럽게 달걀 여러 개와 보울을 건네주며 붙임성 있는 대답을 이을 수 있었다.


“우선 그 보울 안에 달걀을 깨서 넣어주시겠습니까? 저는 계량을 마저 해야 해서요.”
“그냥… 깨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네.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할 필요 없으니 요령껏 박살내셔도 껍질만 안 들어간다면 상관없습니다.”


돗포는 일차적으로 발끈했다. 아니 누가 박살을 낸다고 그래요, 사람을 무슨 괴력맨으로 아나! …라고 따지고 싶었으나, 생각해 보니 무척 합리적 의심이란 판단이 들어 얌전히 입을 다물고 동글동글한 달걀을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 요리도 못 하고 베이킹은 더더욱 해 본 적 없다고 큰소리치듯 주장했던 건 자기 자신이니까. 이제 와서 반박할 체면은 없겠지. 그 상태로 아무 생각 없이 툭, 하고 계란을 보울 테두리에 부딪치자 산산조각 난 노른자가 잘게 부서진 껍질과 함께 안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 잠깐 넋을 놓고 있다가 이내 허둥지둥 작은 숟가락으로 계란 껍질을 떠내기 시작하면서 돗포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큰일 났다. 어쩌면 이루마 쥬토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혹은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이나 행동들을 죄다 기억하고 있는 걸 수도 있고. 그러나 다음 달걀을 손에 쥐면서 자연스럽게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무심코 손에 더 힘이 들어갔는지 퍼석, 하고 이번에도 껍데기가 자디잘게 부서졌다.

그러기를 몇 분째, 어느새 계량을 다 마친 것인지 이루마 쥬토가 옆에서 가볍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다 깨셨습니까?”
“아, 그, 네! 이제 다 빼냈어요!”


동문서답이었지만 돗포가 허둥지둥 숟가락으로 뭔가를 열심히 캐내는 걸 본 쥬토는 굳이 뭘 빼냈냐고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아무 말 없이 돗포에게서 받아 들은 보울에 계량했던 밀가루 및 다른 재료들을 털어 넣기만 했다. 천천히 주걱으로 저어 잘 녹여주자 그저 계란 푼 물이었던 보울 안 내용물이 레몬빛을 띤 예쁜 색의 반죽으로 변해 갔다. …이게 바닐라 향이라는 걸까. 뭔가 은은하니 좋은 냄새가 나서 돗포는 저도 모르게 쥬토에게 바짝 붙어 보울 안을 들여다보았다. 혹여나 골라내지 못한 계란 껍질이 보일까 손에 스푼을 꼭 쥔 채로. 안절부절못하는 돗포를 보며 쥬토는 남몰래 웃음 지었다. 그리곤 보울 안의 반죽들을 천천히 섞어주면서 듣기 좋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권했다.


“이제 이걸 프라이팬에서 구우면 됩니다만… 직접 해 보시겠습니까?”
“엣, 제가요? 그치만 분명 망할 텐데….”


버릇처럼 부정적인 말투가 튀어나왔지만 그와 동시에 몰려드는 회의감에 돗포는 저절로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어째 아까부터 죄다 못 하겠다고만 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베이킹이 처음인 건 서로 마찬가지인데. 이대로 가다간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조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요청했다.


“그래도 이루마 씨가 도와주시면… 시도는 해 볼게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어렵진 않은 것 같으니 우선 제가 하는 걸 잘 보세요.”


잔뜩 주눅이 든 자신과 달리 되돌아오는 상대의 반응은 산뜻하기 그지없다. 그에 조금 얼굴을 붉히며 돗포는 우물쭈물 제 양손을 붙잡았다.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은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자신이 어떤 불평불만을 꺼내도, 제아무리 밑도 끝도 없이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늘어놓아도 이루마 쥬토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언제나 어른스럽고 다정한 태도로 대화를…….


“…자카 씨, 칸논자카 씨?”
“헉, 네! 죄송합니다.”


돗포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했다. 바로 옆에서 부르는 소리도 못 들을 만큼 회상에 열중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왜 자꾸만 과거 일을 떠올리는 것일까. 이런 바보 바보 바보. 마음 같아선 제 머리라도 쥐어박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꾹 억누른 채 돗포는 쥬토를 올려다보았다. 헤, 헤헤…. 죄책감이 섞여든 얼굴로 조금 고생하며 시선을 마주치자, 맞은편의 아름다운 녹색 눈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아뇨, 사과하실 건 없습니다. 지금부터 만들 거니까 잘 보시면 됩니다.”
“네!!”
“프라이팬이 잘 달궈지면 우선 반죽을 한 국자 떠서 이렇게, 가볍게 한 바퀴 둘러주고….”


아, 시작은 마치 오므라이스를 만드는 것 같은 과정이라고 생각하면서 돗포는 저도 모르게 프라이팬 안에 시선을 집중했다. 다시 보니 오므라이스보다는 부침개에 더 가까운 듯했다. 손목 스냅을 이용해서 구석구석 반죽이 골고루 퍼지게 해 주고, 적당히 익었다 싶었을 때 뒤집개를 이용하여 반대쪽도 구워주면 된다고. 바로 곁에서 조곤조곤, 이루마 쥬토가 마치 초등학교 선생님을 방불케 하는 태도로 자세히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러더니 몇 초 후 반대쪽도 잘 익었을 즈음 찢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접시 위에 올려 식히면 된다며 완벽하게 잘 구워진 노릇노릇한 크레이프를 보여주었다. 그리곤 시범은 이게 끝이라는 듯 돗포에게 손짓했다.


“도와드릴 테니 해 보시겠습니까?”
“……네, 그럼 부탁드립니다. 으, 그러니까 우선은 한 국자 떠서….”


해 보겠다고 직접 외쳤던 이상 도망갈 길이 없다. 돗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 쥬토가 서 있던 자리로 다가와 프라이팬 손잡이를 잡았다. 불 앞이라 저절로 전신에 긴장이 들어가고 말았다. 아까부터 무서워서 최악의 상황만이 머릿속에 연신 그려진다. 혹시나 자신이 부엌을 불바다로 만들까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래도 떨리는 손으로 무사히 반죽을 붓자 치익, 하고 뭔가 고소한 향기가 났다. 이 상태로 빨리 손목을 돌려야 하는데…. 원리는 알겠으나 정작 어떻게 실행에 옮겨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머뭇거리고 있자, 이루마 쥬토가 슬쩍 손을 겹쳐 프라이팬 손잡이를 쥐고는 힘을 주었다.


“여기를 잡고 이렇게… 원을 그리듯이.”
“아…… 네.”


낯선 온기와 어딘가 익숙한 감촉. 자연스럽게 손이 맞닿았다는 사실에 놀라 돗포는 자칫 입술을 깨물 뻔 했다. 따뜻하고 자신보다도 큰 것 같은 하얗고 아름다운 손이, 제 손 위로 겹쳐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애써 평정을 유지하곤 있었지만 숨도 못 쉴 만큼 등이 뻣뻣해져 갔다. 반죽이 익어 가는 일분일초가 한 시간처럼 느리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다 그대로 쥬토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한쪽 면을 뒤집자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려서인지 돗포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그런 그의 후들거리는 다리와 하얗게 질린 모습을 본 쥬토는, 짧은 시간 만에 이미 무슨 일인지 다 파악했다는 듯이 천천히 돗포의 허리를 붙잡아 지탱했다. 그리고 인심 쓰듯 두 개의 선택지를 제안했다.


“어때요. 이대로 반죽을 더 구우시겠습니까, 아니면 저 대신 생크림을 휘핑해 주시겠습니까?”
“휘핑……! 그럼 제가 휘핑할게요.”
“네, 그럼 이쪽으로.”


내심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고 생각하면서도, 불 앞을 벗어날 수 있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며 돗포는 쥬토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방금 건으로 한 가지 알게 된 점이 있었다. 이루마 쥬토에게선 좋은 향기가 난다. 바닐라 익스트랙도 설탕도 관계없고 그 자체로 은은하니 부드러운 냄새다. 반쯤 넋이 나간 채 쥬토가 보울과 생크림, 휘핑기를 나란히 놓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돗포는 그 사실을 연거푸 곱씹기만 했다. 생크림이 단단해질 때까지 휘저어주면 된다는 설명을 들으면서도 무턱대고 아무 생각 없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쥬토가 휘핑기를 손에 들려주고 도로 반죽을 구우러 가는 걸 봤을 때에야 후우 하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좋아.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해 보자. 그런 다짐과 함께 주먹 쥔 손에 꾹 힘을 주고, 돗포는 방금 전 쥬토가 시범 보였던 동작을 그대로 따라 했다. 엄청난 기세로 생크림을 휘젓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마치 보울에 구멍을 뚫으려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요령은 모를지언정 의욕만큼은 있는 돗포였다. 내심 자신에겐 반죽을 뒤집는 기술이나 계란을 잘 깨는 세세함보다도 이런 쪽의 힘을 쓰는 단순노동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돗포는 열심히 그리고 끝없이 생크림을 저어댔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반 시간 후. 등 뒤에서 우당탕탕거리는 소음과 낮은 비명을 애써 못 들은 척 무시하고 반죽을 굽고 있던 이루마 쥬토는 마침내 마지막 크레이프 한 장을 완성시켜 접시 위에 쌓았다. 프라이팬에서 손을 떼고 살짝 불안한 시선으로 뒤를 돌자, 테이블 위에 돗포가 기진맥진하게 늘어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놀란 나머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쥬토는 생사 확인이라도 하듯 진척 상황을 물었다.


“다 끝내셨습니까?”


팔에 쥐가 난 것처럼 으으, 작게 신음하며 바르작거리는 돗포가 가련하면서도 또 나름 귀여워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일단은요. 근데…… 저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요.”
“그것참 안타깝지만 이제 와서 중도 포기를 하실 수는 없으니 그냥 잠자코 고통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으실 것 같군요.”


뭘 어떻게 휘저으면 저런 곳까지 생크림이 튀는 건지. 팔이나 얼굴은 물론이고 머리며 테이블 이곳저곳에도 흰 자국이 남아 있는 돗포를 보면서 이루마 쥬토는 입속으로 몰래 즐거워했다. 물론 눈앞에서 미간을 찌푸린 칸논자카 돗포가 윽, 하고 신음하는 걸 보고 있자니 조금 미안해지기도 했지만. 그나저나 이렇게 여기저기 튀어서야 과연 남은 생크림이 있을지조차 모르겠다. 그런 걱정에 슬쩍 돗포가 작업하던 보울 안을 들여다본 쥬토는 예상과는 다르게 단단한 형태를 갖춘 하얀 생크림이 먹음직스럽고도 몽글몽글하게 서 있는 걸 보고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역시 영업사원, 한다면 하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그런 돗포에게 제법 잘하셨는데요, 하고 칭찬을 해 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쥬토는 입을 열기 직전 테이블 위에서 작게 혀를 차는 소리를 듣고 그럴 마음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불량 경관.”
“방금 뭐라고 하셨죠?”
“우으, 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


쥬토는 잠깐 눈을 가늘게 떴지만 화를 내는 대신 곧바로 얼굴 근육을 풀면서 쓰러져있는 돗포를 일으켜 세웠다. 양손으로 어깨를 붙잡고 우연인 것처럼 팔을 타고 스르륵 내려가자 품 안에서 돗포가 긴장하여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여간 언제 봐도 이 반응이 귀여웠다. 무방비해 보이면서도 막상 다가가면 경계가 장난 아니고, 생각보다 허술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은 이 남자는 항상 제 안에 깊숙이 감춰뒀던 승부욕과도 닮은 감정을 끌어내곤 했다. 그런 돗포의 팔을 은근하게 쓸어내리다 손아귀에 생크림을 펴 바르기 위한 스패츌러를 쥐여 주면서 쥬토는 나지막이 웃었다.


“자, 조금만 더 힘내요. 이제 곧 끝이니까요. 크레이프 케이크 좋아하잖아요? 생크림을 잔뜩 발라야 달콤해지죠.”
“읏, 네…. 알겠습니다….”


지쳐 쓰러진 줄 알았던 돗포가 항복하듯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생각보다 더 단단한 사람이라니까.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요령껏 평온한 얼굴을 가장하면서, 쥬토는 차근차근 크레이프 위에 생크림을 바르는 법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칸논자카 돗포가 좋아하는 크레이프 케이크는 여기서부터는 만드는 작업이 퍽 간단하고도 반복적으로 변했다. 잘 구워진 크레이프를 한 장 깔고 그 위에 생크림을 덜어 고르게 펴 바르고, 다시 그 위에 크레이프를 깔고 생크림을 바른 후에 다시 그 위에 크레이프를 덮는…….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며 해나가기엔 너무도 무료한 작업이라, 한 다섯 장쯤 겹쳐 쌓았을 때 쥬토는 무심코 중얼거리고 말았다.


“그나저나 당신도 정말 겁이 없으시군요.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이런 곳까지 따라오시다뇨.”


역시나 반쯤 죽은 듯한 눈으로 하염없이 생크림을 바르고 있던 돗포가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흥분하며 눈을 치켜떴다.


“그야 이루마 씨가 다짜고짜 오라고 협박조로 다그쳐서 어쩔 수 없이!”
“그런다고 정말 차에 타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순식간에 둘 다 언성이 조금씩 높아졌다. 진심으로 억울한 표정을 짓는 돗포를 보자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어 쥬토는 저도 모르게 가볍게 혀를 찼다. 그리고 틈틈이 크레이프에 설탕 시럽을 발라주면서 집요하게 캐물었다.


“설마 상대가 누군지 관계없이, 따라오라고만 하면 아무나 다 따라가는 겁니까?”
“그건…….”


돗포는 한 방 맞은 듯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리곤 대답 대신 성난 손짓으로 생크림을 마구잡이로 발라 댔다. 그야… 그래도 이루마 씨니까 믿고 따라온 거죠. 그 한마디가 목구멍에 걸린 듯, 죽어도 나오질 않았다. 아마 하찮은 자존심 때문이겠지. 이 사람과의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면 제게 남은 것은 고작해 봤자 그런 것밖에 없었으니까. 화를 삭이려는 듯 입을 꾹 다물어버린 돗포를 지켜보던 이루마 쥬토는 그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그리곤 묵묵히 돗포의 손길이 지나간, 거칠기 짝이 없는 생크림을 바르게 펴는 작업을 시작했다. 튀어나오거나 울퉁불퉁한 부분 없이 매끈하고도 완벽하게 크림을 정리하는 그 세심한 손길에, 드러내놓고 티를 내진 않아도 돗포는 순수하게 감격했다. 와, 드디어. 이제 마지막 한 장만 더 올리면 완성이구나. 그는 지금까지 쌓아 올린 크레이프에 눈길을 주며 버릇처럼 몇 장인지를 셌다. 그러는 사이 이루마 쥬토가 뒤늦게 덧붙이는 소리가 미적지근하게 귓가에 들러붙었다.


“아니라면 다행입니다.”
“…….”


쳇. 돗포는 짧게 혀를 찼다.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있는데도 역시 못마땅한 기분이 들어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이 사람은. 자신이 지금 누구 때문에 이런 짓까지 하고 있는데…. 분한 마음을 억누르듯 그는 서둘러 마지막 크레이프를 생크림 위에 올리고 설탕 시럽을 발라 완성했다. 다 만들어진 케이크를 보니 복잡미묘하면서도 조금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 가게에서 크레이프 케이크를 주문할 때는, 층층이 쌓인 단면을 보면서 안정을 찾곤 했지만, 이렇게까지 힘든 작업으로 만들어지는 줄 알았더라면 좀 더 감사의 마음을 담아 먹었을 것이다. …사진 찍어도 되려나.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져 돗포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곁에 서 있던 이루마 쥬토가 케이크 한가운데에 커다란 초를 하나 꽂는 걸 목격했다. 갑자기 웬 초지, 라고 생각한 순간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부엌에 나직이 울려 퍼졌다.


“생일 축하해요.”


헉. 돗포는 숨을 들이켰다. 일순 너무 놀란 나머지 머리가 잘 돌아가질 않았다. 어안이 벙벙한 채 멈춰 서서 돗포는 쥬토의 얼굴과 크레이프 케이크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니까 이 케이크가… 저요? 제 생일 케이크예요? 그런 의문을 눈빛에 담은 채 쳐다보자 이루마 쥬토가 가슴 포켓에서 라이터를 꺼내어 초에 불을 붙였다. 철컥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낮고 잔잔한 설명이 이어졌다.


“정확히는 다음 주 금요일인 15일이 생일이었죠, 아마. 아직 좀 이르긴 하지만 금요일 저녁엔 따로 케이크를 만들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무리하게 여기까지 데려왔습니다. 갑작스럽게 억지를 부려 끌고 와 죄송합니다. 이왕이면 당신이 좋아하는 케이크를 먹여 주고 싶었는데, 딱히 다른 핑곗거리가 생각나질 않아서요.”


일렁이는 촛불 너머로 좀처럼 믿기지 않는 말이 들려왔다. 생각지도 못 했던 서프라이즈에 돗포는 조금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았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런 그에게, 좀 전보다 훨씬 후련해진 표정의 이루마 쥬토가 시원시원한 웃음을 흘리면서 ‘소원 빌어요’하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줄곧 뭔가를 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아, 그… 네, 소원 빌게요. 이루마 씨 감사해요.”


좀 더 매끄럽게 대화를 이어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넋 놓고 쥬토를 바라보느라 돗포는 혀가 반쯤 굳어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게다가 뜸을 들일수록 불이 붙은 양초에서 촛농이 녹아 흐르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다. 금방이라도 케이크 위에 떨어질 것 같다고 생각해서, 돗포는 급하게 ‘올해는 정시에 퇴근하게 해주세요!’하고 소원을 빈 후 가볍게 촛불을 불어 껐다. 왁스가 녹는 냄새, 그리고 살짝 매캐한 연기. 이루마 쥬토가 불 꺼진 초를 빼내는 걸 보고 있자니 살짝 허탈해진 탓에 속마음이 절로 흘러 나왔다.


“저,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이루마 씨가 생일을 챙겨 주실 거라고는 미처 상상도 못 했어서요.”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그래도 나름 하룻밤을 같이 보낸 사이인데.”


그 순간 돗포는 제 귀를 의심했지만 이미 삽시간에 얼굴 구석구석까지 열이 사르르 번지는 것을 감지한 후였다. 아……. 아, 역시 이 사람도 그날 밤 일을 아직 기억하는구나.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인데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고 좀 죽고 싶었다. 으아으아. 입을 뻐끔거리면서 시선 둘 곳을 찾다가, 끝내 몰려드는 죄책감을 더는 피할 수가 없어 돗포는 고개를 푹 숙이고 늦어도 한참 늦은 사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루마 씨, 그날은… 아침에 말도 없이 멋대로 사라져서 죄송했습니다. 진작 사과드렸어야 했는데 늦어져서 정말 면목이 없어요. 그때는 제가 그…… 좀 당황스럽기도 했고 사실 경황이 없었어서….”
“혹시 제가 침대에서 그렇게 별로였습니까?”
“네? 아뇨, 아뇨! 무슨 그런 말을, 오, 오히려 그 반대였…는데……요.”


이런 젠장, 돗포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떠보는 말에 휘둘려서 아직까지 그날 밤을 잊지 못 한다는 식의 말을 내뱉어 버렸다. 하, 아하하…….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시키려고 했지만 마음 같아선 제 입을 꿰매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촛불의 힘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정함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이루마 쥬토의 저 그림 같은 미소 때문이었을까. 다정한 목소리 톤이 문제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저 사람한테 은은하니 좋은 향기가 나서? 모르긴 해도 돗포는 쥬토가 내뿜는 분위기에 자신이 늘 힘도 못 쓰고 감쪽같이 당하고 만다는 것은 알았다. 대표적인 예로 지금만 해도, 날을 바짝 세우고 있던 마음이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흐물흐물해지고 있는 것이다. 

아, 빌어먹을. 그제야 자신이 총체적으로 이루마 쥬토에게 너무 무르고 약하단 사실을 끝내 인정하면서 돗포는 쏟아지는 무기력함에 그저 몸을 떨었다. 분명 현재 자신의 이런 심정 따위는 전혀 알지 못할 쥬토의 저 잘난 얼굴이 지금만큼은 엄청 얄밉게 느껴졌다. 특유의 의기양양한 눈빛이며 끌어 올려진 입매, 그리고 그 보기 좋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말들 또한 그랬다.


“그럼 키스 한 번으로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키스요?”
“네. 이제 와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생각됩니다만.”


그 말에 내포된 은근한 뜻을 읽고 돗포는 내적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아으아, 거기서 멈춰요! 이 에로 경관!! 그대로 내버려 뒀다간 ‘어차피 저희 한 번 잔 사이잖아요’라는 말을 다시 듣게 될 것 같아서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는 순식간에 손바닥으로 이루마 쥬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 할게요! 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왠지 모르게 필사적인 돗포를 보면서, 쥬토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아직까지도 제 입을 덮고 있는 손바닥에 쪽, 하고 입 맞췄다. 그러자마자 우와아악!! 하고 괴성을 지르며 돗포가 잘 익은 홍당무 같은 얼굴로 급히 손을 떼어냈다. ……하여간에 정말 귀여운 사람이다. 이제 와서 고작 이 정도 스킨십에 일일이 놀라는 반응을 보이다니. 그런 짧은 감상을 곱씹으며 쥬토는 쐐기를 박듯, 참을성이 모자라는 태도로 또 한 번 돗포를 졸라대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제 인내심은 지금 바닥나기 일보 직전이라서요, 칸논자카 씨. 정말 저한테 미안한 마음이 있으시다면 지금 당장 키스를 해 주시는 건 어떨까요.”
“윽, 으윽, 알겠다구요. 하면 되잖아요, 하면…….”


골난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루마 쥬토는 자꾸 올라가려는 광대를 애써 진정시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부추기면 부추기는 대로 곧잘 제게 맞춰주는 칸논자카 돗포가 좋았다. 연신 눈치를 보는 듯 뜸을 들이더니, 갑자기 두어 걸음 더 앞으로 다가와서는 어렵사리 눈을 맞춘 채 이쪽을 올려다보는 것까지. 서툴지만 모든 일에 열심이라서 무엇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부분이 없다. 용케도 거리를 빠르게 좁혀왔다 싶더니만 갑자기 용기가 떨어지기라도 했는지 바로 코앞에서 돗포가 망설이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본인도 민망했는지 대뜸 다른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저 혹시 그럼 오늘은… 처음부터 저 때문에 크레이프 케이크를 만들려고 하신 건가요?”
“당신이 그걸 좋아한다고 들어서요. 마음에 들어 해 주시면 좋을 텐데 역시 무리일까요?”
“앗, 아뇨, 마음에 들어요. 처음 만들어 보는 거라 좀 고생을 하긴 했는데 그래도 완성된 걸 보니 기분이 좋았어요. 그……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제가 이런 일은 처음 겪어보거든요.”


뺨이 발그레해지는 듯하던 돗포가 다시 고개를 숙여 버렸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조곤조곤 말하는 걸 보고 있자니 어째 인내심 테스트를 받는 것 같아서 쥬토는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아야 했다. 이대로 고개만 숙이면, 바로 키스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가장 원하는 것이 눈앞에 있는데도 필사적으로 참아야 하는 제 신세가 퍽 기구했다.


“아직 진짜 생일 선물도 드리질 못 했으니 그렇게까지 감사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은 케이크만 들려 보내드리고, 진짜 선물은 생일 당일에 회사 앞으로 찾아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진짜 선물이라니, 그렇게까지 받아버리면 제가 너무 염치가 없는데…….”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었다. 이루마 쥬토는 기다리고 또 기다려 마지않았던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자꾸만 허리를 끌어안고 싶어 꿈틀대던 손을 위로 올린 그는 자연스럽게 돗포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리곤 격렬하게 휘핑을 한 흔적인 듯, 그 부드러운 피부 위에 조금 튄 생크림을 손끝으로 문질러 닦아 주었다.


“정말 고맙다고 생각하신다면 5월 30일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5월 30일…. 아, 설마.”


과거에 들은 적이 있던 일련의 기억을 떠올린 듯 돗포의 눈이 커다래졌다. 쥬토는 그 이상 웃음을 주체할 수 없는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더니 돗포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아예 못을 박듯, 혹은 확인 사살을 하듯이.


“네, 그때쯤엔 저도 생일일 테니까요.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곤 닦아낸 생크림이 묻은 손을 그대로 입 안으로 가져가면서 교묘하게 웃었다. 음, 다네요. 일부러 쪽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핥자 바로 앞에서 돗포의 눈동자가 파도치듯 격하게 요동쳤다. 곧이어 맛보게 될 입술은 이것보다도 훨씬 더 달콤하겠지, 분명. 사냥감을 포획한 포식자 같은 여유로운 태도로 쥬토는 차분하게 돗포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뜨겁고도 부드러운 감촉이 뭉그러지듯 세게 부딪쳐 왔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도 더 그 열기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역시 생크림보다도 이쪽이 더 취향이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만족스러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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