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칸논자카 돗포가 10살이 되던 해 동생이 태어나고, 부모님은 뒤늦게 태어난 동생에게 신경 쓰느라 돗포를 챙기거나, 나아가 크리스마스 같은 기념을 챙기는 것도 힘들 정도라는 것은 어린 돗포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부모님의 노고를 알기에 돗포는 그저 괜찮다 말하며 넘어가곤 했었다.
나중에 돗포의 사정을 알게 된 히후미가 “그럼 히후밍이랑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면 되잖아.” 라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꺼낸 것을 계기로 그 후로 크리스마스엔 언제나 히후미와 함께였다.
작은 트리 아래서 함께 먹던 가라아게와 딸기 생크림 케이크, 그리고 콜라를 시작으로 매년 음식을 하나둘씩 들어갔고, 고등학생이 되어선 어른들을 흉내 낸다는 이유로 무알콜 샴페인을 사와 마시던 중 분위기에 취한 히후미가 고백을 하기까지 칸논자카 돗포는 이자나미 히후미와의 크리스마스를 함께했다.
손에 들고 있던 잔을 저도 모르게 떨어뜨릴 뻔 했지만, 평소와는 달리 진지한 얼굴로 자신에게 진심을 고백하는 히후미에게 돗포는 대답대신 히후미에게 물었다.
“앞으로도 나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줄거야?”
그 말에 히후미는 활짝 웃으며 “그 어떤 날에도 난 돗포칭이랑 함께 할 거야.” 라는 그 한마디에 입을 맞췄었다.
“히후미. 새삼스럽지만 난 네가 이렇게까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인 줄은 몰랐던 거 같아. 그만큼 네가 내 말을 잘 들어줬으면 좋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겠지? 이것도 다 너랑 오랜 소꿉친구이면서 연인이 되었을 때 그 어떤 날에도 나와 함께하겠다는 네 말을 듣고 너랑 사귄 내 탓일 거야.”
“냐하핫! 돗포칭~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늦었다니까?”
“하아…. 이것도 다 크리스마스인지도 모르고 초밥을 사온 내 탓. 기념일을 중요시하는 히후미 너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 한 내 탓.”
“뭐 어때! 나 이집 초밥 좋아하는 거 알고 일부러 사와 준거잖아.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초밥이라니 어쩐지 우리 같아서 재미있는 걸?”
여전히 자기 탓을 하며 우울해하는 돗포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입에 연어초밥을 먹여주자 돗포는 익숙하게 음식을 씹으며 히후미를 바라보았다.
“돗포칭이 먹은 거 연어뱃살이던데 그거 하나뿐이었던 거 알아?”
“그러게. 히후미 네가 좋아하던 거 아냐?”
“응.”
“맛이라도 볼래?”
“맛만 볼 거야?”
기껏 분위기를 잡는다며 켜둔 미니트리에 얹힌 불빛도, 두 와인 잔에 따라둔 두 사람을 위한 샴페인도 지금의 두 사람에겐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매일 보는 얼굴이지만 매번 같은 패턴으로 넘어가는 것이 우스울 정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질리지 않는 것을 보면 칸논자카 돗포는 그 날 자신이 이자나미 히후미에게 했던 약속을 떠올려 보였다.
“네가 나라는 존재를 지겨워 할 때까지 나는 언제까지고 너와 함께 하도록 할 거야. 히후미.”
크리스마스의 밤은 짧다. 그리고 두 사람의 하루는 앞으로도 길게 이어질 것이다. 그 둘이 맺어온 크리스마스의 인연처럼.

겨울은 시린 계절이다. 많은 것들이 얼어붙고 움츠러든다.
올해도 다르지 않았다. 풍경을 덮은 공기의 채도는 차차 엷어져갔다. 나뭇잎은 예정대로 낙엽이 되어 스러졌으며, 동물들은 하나 둘씩 잠에 들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착장은 점차 두꺼워졌다. 보통의, 언제나와 같은 겨울이었다.
***
점심시간, 로쇼는 식사 후 산책 겸 밖으로 나섰다. 건물 뒤에 난 쪽문에서 발을 내딛자 곧 피부가 뒤집어질 것만 같은 추위가 저를 반긴다. 매서운 공기는 호흡을 얼렸다. 감기에 걸릴세라, 그는 재빨리 오른손에 든 커피로 가슴을 데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교직 생활,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학기의 끝이 다가와 겨울 방학식을 앞두고 있었다. 교사로서 부족한 자신이었는데, 꽤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어깨가 조금 무겁게 느껴졌다. 그래도 친구 같은 선생님이라면 그럭저럭 되어 주었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도닥이며 움츠러든 어깨를 바로 했다.
모퉁이를 빙 둘러 나오자 운동장에서 뛰노는 제자들이 몇 명 보였다. 이 추운 날 기세도 좋지. 아이들이 그를 발견하더니 로쇼 쌤, 하고 반갑게 인사한다. 그래, 그래. 로쇼는 온기 어린 눈으로 제자들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쌤 잘생겼어요―!”
“샘, 랩 한 번만 해주세예―”
“와아아!”
“뭐야. 뜬금없이 웬 랩 타령인데?”
기가 차 코웃음 쳤지만 아이들은 끈질기게 애원해왔다. 어쩔 수 없지. 옜다, 라임 한 번 받아라. 로쇼는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마이크 삼아 랩을 선보였다. 스스로도 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제자들이 즐거워한다면야.
그렇게 두어 소절 읊었을까, 멋쩍은 나머지 결국 제 실소에 가사를 묻어버린다. 엉망진창에 별 것 아닌데도, 아이들은 선생님을 향해 열성적인 지지를 표현했다.
“선생님 파이팅!”
“그래그래, 다들 감기 안 들게 조심하고.”
로쇼의 애정 담긴 잔소리에 아이들은 까르르 웃더니 다시 운동장을 활개하기 시작했다. 뭐가 저리도 즐거울까. 자기들끼리 하염없이 재잘대는 아이들의 입가에서 저마다의 호흡이 뽀얗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그 모습이 퍽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생명이 눈에 보이는 유일한 계절. 로쇼는 겨울을 좋아했다.
***
연말과 가까운, 성탄절 전야 특유의 소란스럽고 어수선한 공기가 거리를 흐릿한 빛망울로 물들였다. 길 위의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은은한 반짝임에 홀딱 취해 있었다. 외부 스케줄을 모두 마친 사사라는 그들 사이를 홀로 비집고 사무소로 돌아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 저 너머 로비 한 구석에서 꽤나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잔뜩 들떠서 야단법석을 쳐대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제 동기들이었다. 코미디언 여럿이 모이면 뭔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는 중일 확률이 높으렷다. 무슨 재밌는 일이라도 있는 걸까, 호기심에 빠진 사사라가 동기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뭔데 다들 이렇게 우르르 모여 있는 기가?”
“마침 잘 물어봤다. 이따 다 같이 회식하기로 했다!”
“회식?”
아, 괜히 물어봤다. 그저 그 생각뿐이었다. 오늘은 왠지, 제 평온한 일상을 팔아서까지 재미를 얻을 기분이 아니었기에.
“니 빠지믄 재미 읎다. 나와도!”
“걱정 마라. 내도 있다이가!”
“니는 오히려 빠지는 편이 분위기 띄우는 기다!”
동료 두 명이 사사라를 향해 끈덕지게 구걸하더니 끝내 저들끼리 보케와 츳코미를 이뤄 티격태격대기 시작했다. 직업병이란 게 참 무섭다. 사사라는 속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자기들끼리 떠들썩대는 바보 두 명을 뒤로 하고, 다른 동기가 ‘나와 줄 거제?’ 하며 확인하듯 되물었다.
“아, 미안! 내는 이미 선약이 있어가.”
“선약!?”
사실 그런 거 없지만.
그로서도 충분히 예상한 반응이었으나, ‘선약’ 이란 단어 하나에 피곤한 리액션들이 돌아왔다. 동기들이 일제히 제법이라는 듯 ‘오오-’ 거리더니, 자기들끼리 발들을 동동 구르며 난리법석을 쳐대는 것이다. 역시 여자친구? 하고, 하나가 묻자 함성은 훨씬 크고 적나라해졌다. 아니, 대답도 한 적이 없는데 뭔 난리고. 끝내는 다른 동료 한 명이 ‘콩그레츄’ 를 천천히 선창하기 시작하며 곧 로비가 축하 판이 되어버렸다. 이 혈기 왕성한 총각들 같으니라고. 진정시키지 않으면 당장에 축의금이라도 들고 올 기세들이었다.
“유감이지만, 여자친구가 아이고 그냥 친구다.”
“저거저거, 빼박 아이가?”
빼박은 무슨, 영하 4도에 얼어 죽을 놈의 빼박. 할 수만 있다면 사랑과 우정의 힘으로 저것들 전부 어디다 치워버리고 싶구마……. 아니, 포지티브한 생각. 사사라는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찰나였다. 잘못 걸려든 그에게 도움을 건네주러 왔다는 듯,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이스 타이밍.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크리스마스가 지나기 전에 훤칠하고 곱상한 연인이 생기길 빈데이. 사사라는 발신자에게 소소한 축복을 건네며 제 왼쪽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발신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제 친구, 로쇼였다.
***
사람 없는 외진 공터, 별 하늘 아래 쪼그려 앉아 노닥거리는 사사라 옆으로 로쇼의 천체 망원경 설치가 한창이었다. 사사라는 제 친구가 능숙하게 관측 장비를 다루는 모습에 홀딱 빠져 있었다. 어쩌면 천체 망원경 앞에 선 제 친구의 모습이, 스탠딩 마이크 앞에 선 자신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온전히 로쇼만의 무대 같았다.
“로쇼, 윽수로 멋있데이.”
사사라의 한마디에 로쇼는 ‘별 게 다 멋있다.’며 망원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사사라는 제 칭찬에 무뚝뚝하게 응하면서도 눈은 웃고 있는 로쇼의 모순이 재미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모순을 꼬집어 잔뜩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고 싶었지만, 괜히 건드렸다가는 눈가에 머금은 나긋한 웃음이 사라질세라, 그저 구경만 할 뿐이었다.
한편, 설치를 마친 후 장비를 이리저리 만져보던 로쇼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뭐 문제라도 있나?”
“어. 그게……”
천체관측을 위해 멀리까지 찾아온 그들이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만 장비에 문제가 생겨버리고 말았다. 로쇼는 조립했던 장비를 맥없이 해체하기 시작했다.
“…미안타, 기껏 불러놓고.”
“뭔 소리고? 내는 무슨 이유로든 니가 먼저 불러가 이리 기쁜데!”
“크리스마스 아이가. 회식이라든지, 주위에 부르는 사람도 많지 않드나?”
“니랑 있는 게 가장 편하니까 나온 기다, 로쇼.”
“내는 이제 막 방학이지만, 니는 내일 스케줄도 있을 테고…….”
제 친구의 과도한 걱정을 가만 듣고 있던 사사라는 사뿐히 일어나 팔다리를 쭉쭉 뻗어 스트레칭을 한 번 하더니, 상대의 팔을 잡아 끌어 도닥였다.
“마, 됐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별이야 망원경 없이 맨 눈으로 보면 되지 않나?”
“어차피 달빛이 방해해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기다.”
로쇼의 냉소적인 반응에 사사라는 고개를 갸웃 했다. 달 때문에 일부 별들이 묻히는 건 사실이었지만, 그저 방해물로 치부하기엔 달빛도 그런대로 근사했기에.
“와 방해라 생각하노?”
“가짜가 진짜를 가리는 거나 다름없다이가. 혼자 힘으론 빛날 수도 없는데.”
“이러니저러니, 결과적으로 지금 제일 밝게 빛나는 건 달 아이가? 모양도 요래 이뻐가―”
달은 스스로 빛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밤하늘에서 가장 찬란한 모습으로 빛나고 있음은 자명했다. 혼자서 빛을 내는 그 어떤 수많은 별들보다도 명확한 빛을 보여주는, 단 하나뿐인 존재. 사사라는 그 점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가끔은 보이는 것 그대로에 집중해 봐라, 로쇼.”
사사라는 로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제 얘기를 들은 상대의 눈동자에 달빛이 잔뜩 담긴다.
“어떻노? 얄구진 생각 않고 보면 꽤 장관 아이가?”
달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런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로쇼에게 이대로도, 어느 쪽도 괜찮다고들 했다. 하지만 정말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이렇게나 사랑받는데, 정말 안일하게 이대로 머물러도 괜찮은 걸까. 과연 사랑받는 만큼의 가치를 하고 있는 걸까. 그에게는 고민거리였다. 이따금씩, 이런 식으로 타인이 건네는 사랑의 무게에 다리가 후들거리는 때가 있었다.
“아마도.”
“그 싱거운 대답은 뭐꼬!”
사사라가 칭얼대더니, 곧 입으로 요란스럽게 연기를 뿜어대며 용가리 흉내를 냈다. 어떻게든 기운을 내게 해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이 나이 먹도록 그런 장난치는 놈은 니밖에 없을 기다. 로쇼는 늘 그렇듯 제 친구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칼같이 딴지를 걸었다. 그러면서도, 오직 추위 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그 생명의 증거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계절, 좋아하는 풍경 아래, 그리고…
로쇼는 사사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눈치 챈 사사라도 성난 용가리 흉내를 그만 두고는 상대를 마주 보았다. 뭐 할 말이라도 있나. 상대의 은근한 아이컨택에 사사라가 고개를 갸웃 하며 물었다. 로쇼는 뭔가 대답하려는 듯 어물쩍거리다 끝내 말을 삼켰다.
“자아, 자. 로쇼 쌤. 그래 나오신다면 저는 들을 권리를 행사하겠심더―”
“마! 와 자꾸 물어쌓노?”
“니랑 내 단 둘이 있을 때 신중히 꺼내는 얘기니까, 분명 중요한 얘기 아이가.”
“...확실히, 그렇지만.”
“로쇼가 해주는 중요한 말, 듣고 싶데이.”
본인으로서도 납득이 되는지, 로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 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계속, 그의 목구멍을 가득 메웠다. 잘못 짚은 거라면, 어떡하지. 가슴 언저리에서부터 올라와 목을 태우는 뜨거운 언어를, 그 사념이 틀어막는다. 그는 침만 꼴깍 삼킬 뿐이었다.
그때였을까, 무대 위에서 열심히 제스처를 하던 그 손이, 점차 로쇼의 눈앞에 가까워져왔다. 도대체 어디 멈춰 설 생각이가, 하며 속으로 재던 찰나 야물딱진 손가락이 그의 오른 뺨을 스윽, 하고 스쳐온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니, 실은 알고 있지만 두려워 외면하고 싶은 심박수 상승에 로쇼는 눈을 꾸욱 감았다 떴다.
손은 잠시 망설이더니 검지와 중지로 슬쩍, 로쇼의 안경줄을 낚았다.
웬 안경줄? 의아해하던 순간, 제 친구의 손이 잡힌 안경줄을 자기 쪽으로 사르르 끌어들인다. 로쇼는 그 손의 움직임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제 친구와 정면으로 눈을 맞춘다.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상대의 뺨이 발그레하다.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그저, 추위에 얼어붙어 벌개졌을 뿐인 게 아닐까. 로쇼는 두려워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를 가만히 응시했다. 왠지 기분 좋은 정적이 공원의 채도를 높인다.
“로쇼.”
사사라가 평소보다 데시벨을 한참 낮춰 작게 속삭였다.
로쇼는 눈빛으로 깊게 깜빡, 대답했다.
로쇼의 소리 없는 응답에 사사라는 살며시 뒷꿈치를 들어 상대와 시선을 맞추었다. 마치 네가 확신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것처럼.
마음을 천연덕스레 간질이는, 햇살을 닮은 그 의사표현이 로쇼를 움직인다. 하늘 위 수많은 별들이 관객이 되어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대에 서는 것만큼이나 떨렸다. 그는 제 눈앞에서 하얗게 술렁이는 호흡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용기를 내어 두 손으로 상대의 발그스레한 뺨을 녹인다. 그 감촉이 제법 재미있는지, 사사라가 해죽 웃었다.
얼어붙어서가 아니구나. 하고 안심하자니 조금, 다시 어깨가 무거워졌다.
그래도 또다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이미 한 번 경쟁의 무게에 짓눌려 상대의 곁을 떠났던 자신이기에. 타인이 건네는 사랑의 무게만은 버틸 수 있도록, 강해지는 것만이 사랑에 보답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을게. 로쇼는 마음에 꾹 눌러쓰며 사사라와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조금씩, 천천히 가까워진다.
마주한 입술 사이로 눈처럼 하얀 숨결이 전해진다.
다시 한 번 서로의 곁에 선 그들의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신 계절이었다.

[사마이치+지로+사부로] 사마토키 씨! 야마다家의 Merry Christmas를 도와주세요!
"사마토키 씨.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뭔데 그렇게 진지한 표정이냐."
"...화내지 말고 들어주세요."
"하? 뭘 부탁하려는 건데."
제 동생들을 위해 산타가 되어주세요!! 눈을 꼭 감고 소리치는 이치로는 굉장히 귀여웠지만, 말하는 내용은 전혀 귀엽지 않았다. 오히려 끔찍했지.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지로와 사부로가 아는 산타클로스는 백발이란 말이에요.. 그렇다고 제가 가발을 쓰고 하기엔 들킬 것 같고요. 그래서 지인 중에서 산타 후보를 생각해보니, 사마토키 씨가 제일 어울릴 거라는 결론이.."
아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면서 그렇게 웃지 말라고. 한숨을 내쉰 뒤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도 고개를 숙여 제 시야에 훤히 들어오는 이치로의 비는 모습에 살짝, 아주 살짝 흔들렸다.
"제발요! 부탁할 사람이 사마토키 씨뿐이에요!!"
"야, 너는.. 그걸 말이라고 하냐?"
"해주기만 한다면, 그 다음 날에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런다고 해서 넘어갈 것 같냐? 넌 대체 나를 뭐로 보냐! 급격히 차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치로를 째려보았다. 그 녀석의 웃는 표정을 보자마자 조금, 아주 조금 풀렸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크리스마스 다음 날, 사마토키 씨와 외박할게요!!"
"좋아."
"승낙이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다 너 보고 해주는 거야. 네 동생이니까 해주는 거라고."
"와! 정말 감사해요!! 다행이다.."
언제나 동생 걱정에 어두워졌다 하면 집으로 들어가던 녀석이 무슨 일로 외박 이야기를 꺼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에겐 횡재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뭘 하면 되는데."
"사마토키 씨는 그냥 산타복 입고, 수염 탈만 붙이시면 돼요! 아, 그리고 약간의 멘트와 함께 선물을 주면 되고요! 정말 고마워요! 사랑해요!!"
팔로 하트를 만든 이치로를 귀여워해 주다가도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 생각이 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나이 먹고 산타 코스프레를 해야 한다니. 다른 사람이 알게 된다면 창피해서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니 이치로의 입을 제대로 막아야겠지.
"야. 이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당연하죠! 저 입 무거운 거 아시죠?"
당연히 그래야지. 기특하다는 듯 이치로의 볼을 꼬집자 아프다며 울상을 짓는 모습조차 매우 귀여웠다. 너무 귀여운 거 아냐?! 표정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다. 내 표정을 직접 볼 순 없지만 귀여운 것을 바라보는 표정이겠지. 이치로 녀석의 표정이 꽤 이상했지만.
"..하하. 사마토키 씨, 혹시 싫은 건 아니죠..?"
"뭐가."
"산타 분장이요."
"뭔 소리야. 한다고 했잖냐. 한 입 가지고 두말하는 사람 아니다."
"제가 사랑한다고 했던가요! 사랑해요!!"
말을 끝내자마자 안겨 오는 이치로를 꽉 껴안아주었다. 귀여운 녀석. 그래, 외박권도 얻었고 사랑한다는 말도 잔뜩 들었겠다. 열심히 해야겠지. 자신의 어깨를 비벼오는 이치로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
"맞다! 한 번 산타복 입어보실래요? 루돌프 옷도 같이 챙겨왔어요!"
"마치 내가 수락할 거라고 예상했다는 태도는 뭐냐."
"하하하.."
루돌프 의상이에요! 어때요? 루돌프 의상을 입은 이치로는 참으로 귀여웠다. 물론, 앞이 안 보여서 휘청거리는 모습만 귀여웠지만. 루돌프의 탈이 붙어 있는 일체형 옷이었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근데 시야 확보는 잘 안 되는 것 같은데. 괜찮냐?"
"당연하죠! 제가 또 감은 좋잖아요?! 아악!!!"
좋기는 개뿔이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다가 식탁에 걸려 넘어진 이치로를 일으켜 세워줬다. 제대로 걸어 다니려면 연습해야겠다는 이치로에게 장단을 맞춰주다가 금세 시간이 흘러갔다.
"아, 덥다. 어라? 지금 몇 시예요?"
"7시인데."
"헉, 저 이제 그만 가야 해요! 동생들 밥 줘야 하는데!"
내가 네 동생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데 동생들은 이해도 안 해주냐!!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유치해질 것 같아 꾹 참았다. 자신을 존경한다는 녀석 앞에서 어린 애처럼 굴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짜증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야. 가기 전에 빼먹은 건 없냐?"
"응? 가방도 챙기고, 휴대폰도 챙겼는데!"
"있을 텐데?"
없다고 답할 게 뻔한 이치로의 입을 제 입으로 막았다. 갑자기 산소가 끊겨 답답하다는 듯 자신을 밀쳐내려는 이치로의 등을 양팔로 꽉 껴안았고, 이치로의 입안을 탐닉하듯 살점 하나하나를 쓸어내렸다. 그렇게 한참을 이치로의 입 안을 휘젓고 다니다가 일부러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하아, 사마토키, 씨! 갑자기, 하시면...."
"...후. 그래서 싫냐?"
"..그건 아니지만..."
누구의 타액인지 모를 타액이 이치로의 입술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거짓말은 못 하겠는지 싫은 티는 내고 싶은데, 정작 싫다는 말은 하지 못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화를 내는 와중에도 풀려있는 이치로의 눈을 보며 입가의 타액을 닦아주었다.
"..저 이제 진짜 가야 해요."
"그래. 데려다줄게."
"정말요?? 감사해요!!"
자신의 팔에 매달려 온갖 아양을 떠는 이치로에게 시선을 맞추며 집을 나섰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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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크리스마스 이브라니.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내키지 않는다는 사실은 여전했다. 깨어나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며 오늘의 일정을 보자, 제 동생과 밥을 같이 먹자는 이치로의 제안 때문에 이치로 집 방문이 적혀 있었다. 그래. 우선은 그 녀석이 예뻐하는 동생들에게 잘 보이는 게 좋겠지. 빠르게 목욕을 끝낸 후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근데 먼저 날 보여주면 들키는 거 아냐? 뭐, 알 바인가."
하라는 거 해준 뒤, 그 다음 날 오붓하게 보내면 되니까. 약속 시간보다 일찍 나와 이치로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곧 크리스마스라고 눈이 오는 것이 매우 귀찮았다. 이러면 운전하기가 힘들잖아.
눈 때문에 예상보다 도착 시간이 늦어졌다. 일찍 나온 게 다행이었네. 옷깃을 정돈한 후 이치로의 집 문의 초인종을 눌렀다.
[헉! 사마토키 씨, 벌써 왔어요?!]
"아아, 그래. 어서 열어라."
들리지는 않지만, 만화처럼 우당탕 소리를 내며 나올 것이 뻔했다. 귀여운 녀석.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온 이치로의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 녀석, 아무리 집 앞이라지만 티 한 장만 입고 나오다니. 너무 얇게 입고 나온 거 아냐?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왜 이렇게 얇게 입고 나왔어요! 오늘 진짜 추운데.. 빨리 들어오세요."
"너야말로 집 앞이라 하더라도 겉옷은 걸치고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
서로의 걱정을 해주며 들어간 이치로의 집은 아늑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거실에 들어가자 티비를 보고 있는 이치로의 동생들이 보였다.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 같은데 다 티가 났다. 묘하게 시선을 내 쪽으로 보냈으니까. 애새끼답다고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지로, 사부로. 이쪽은 아오히츠기 사마토키 씨야. 사마토키 씨, 이 아이들이 제 동생인 지로와 사부로예요!"
"잘 부탁한다."
"..칫."
"..잘 부탁합니다."
누가 봐도 잘 부탁한다는 사람들의 태도가 아닌데. 이치로가 자신들이 사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모양이지만 둘은 은연중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치로의 동생 사랑이 유별나던데, 이 녀석들의 형 사랑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아주 질투로 눈이 불타고 있네.
"다들 배고프겠다! 전 마무리만 하면 되니까 잠시만 거실에서 기다리세요!"
이치로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나름 표정 관리를 했다는 듯 표정이 일그러진 녀석들이 보였다. 그러니까 지로라고 했던가. 정적이 이어지다가 눈이 처진 녀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형아랑 사귀냐?"
"그렇다면?"
"당신, 들어보니 야쿠자라던데 정말이야?"
"그런데, 왜."
내 답을 듣자마자 시선을 교환한 두 녀석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대뜸 하는 말이 매우 가관이었다.
"우리 형아랑 헤어져!"
"우리 이치 형이랑 헤어지지 그래?"
"하아?"
이게 무슨 개소리야. 이 녀석들이 하는 말이 깜찍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혔다. 아니, 이제는 형 연애에도 간섭하는 건가? 요즘 애들이란. 물론 자신도 네무가 누군가와 사귄다고 했을 때, 부족한 사람과 만난다면 헤어지라고 할 거지만. 잠깐, 그렇다면 내가 이치로 녀석보다 부족하다는 거냐?!
"아무리 생각해도 형아가 훨씬 아까워."
"동감이야. 저런 녀석에게 이치 형은 못 준다고."
이것들이. 사람 앞에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한참을 속이 부글부글 끓어가는 동안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드디어 숨통이 트이는 듯한 기분에 뒤를 돌아보는 순간, 자신의 옆으로 무엇인가가 빠르게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형아~ 도와줬어야 했는데! 미안해!"
"너는 안 도와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 이 저능아. 이치 형, 내일은 제가 꼭 도와드릴게요."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아. 사마토키 씨와 할 이야기가 있다 해서 비켜준 건데, 이야기는 잘 했어?"
"응!"
"네!"
그걸 대화라고 하냐? 통보라고 하지. 너희,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 참 잘한다. 애초부터 그런 개소리를 하려고 계획했던 거였구나. 동생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이치로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밥 먹으러 가자는 이치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사, 사마토키 씨?!"
"왜? 싫냐?"
"싫은 건 아니지만.. 동생들이 있거든요."
괜찮아. 저 녀석들 보라고 한 거니까. 고개를 숙여 이치로의 볼에 뽀뽀해주려고 하자 박치기를 당했다. 순간적으로 별이 보였다. 아, 존나 아파. 턱을 감싸고 아픈 티를 내자 이치로가 미안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동생들이 보고 있으니 그런 스킨십은 하지 말라며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표정은 내가 지어야 하는 거 아니냐?!
"됐고, 빨리 밥 먹으러 가요."
민망한지 부엌으로 가버리는 이치로를 허망하게 바라보자 꼬시다는 시선이 따라왔다. 아 진짜, 빡치게 구네. 그래도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하루를 이치로와 보낼 수 있으니까. 참아야 했다. 그래, 나는 어른이다. 저런 애새끼에게 화내면 나만 유치해진다.
-
밥을 먹으면서도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을 정도로 가시방석이었다. 음식 하나하나를 씹을 때마다 못마땅하다는 시선이 자신에게 향했다. 그러다가도 이치로가 제 동생들에게 말을 걸면 그 눈빛이 180도로 바뀌었다. 와, 요즘 애새끼들 지능적이네. 산타를 믿긴 하냐?
"지로, 사부로. 이번 한 해 동안 착한 일 많이 했으니 산타가 선물을 가지고 와주겠네?"
"와아- 너무 좋네요."
"산타가 선물을 주는 것보단 형아가 칭찬해주는 게 더 좋은데!"
저 녀석들 산타 안 믿는 거 같은데! 특히, 사부로라고 했던가. 저 녀석 영혼 없이 말하잖아! 이치로만 모르고 모두가 아는 불편한 진실에 입맛이 뚝 떨어졌다. 그러니까, 산타를 안 믿는 녀석들 앞에서 산타 흉내를 내야 하는 거냐고.
"아 진짜 ㅈ.."
"응? 뭐라고 말했어요?"
"아? 아.. 좋다고.. 하하. 이치로, 요리 잘하네."
"뭐야. 그런 거였어요?"
칭찬받았답시고 좋아하는 표정이 참으로 귀여웠지만, 네가 귀엽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던 동생들의 표정은 전혀 아니었다. 이치로에게 한마디 할 때마다 표정이 가관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점심을 따로 먹자고 해야 했다. 체할 것 같은 느낌이다.
-
"얘들 자는 것 같죠?"
"12시잖아. 새나라의 아이들이라면 일찍 자겠지."
"우리 애들은 착해서 자고 있을 거예요."
"넌 정말.. 하, 아니다."
자신에게 흰색 수염 탈과 산타복을 쥐여준 이치로는 루돌프 의상을 입고 엎드렸다. 사마토키 씨, 저 루돌프 같아요?! 굉장히 해맑게 물어본지라 시중에서 파는 루돌프 탈을 쓴 사람 같다는 솔직한 감상 대신 대충 그렇다고 대꾸해줬다. 빠르게 산타 분장을 끝내자 이치로는 식탁에 있는 선물을 가져왔다.
"지로에게 먼저 가요. 지로 선물은 파란색 포장지의 상자예요."
엎드려서 지로의 방으로 기어가는 이치로는 가여울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이제는 산타를 믿지 않는 동생들을 위해 저럴 것까지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애인에게 코가 꿰여 산타 분장을 한 나 자신에게도 연민이 느껴졌다.
지로라는 녀석의 방문을 살짝 열자 자는 녀석이 보였다. 배를 드러내며 자유분방하게 자는 모습에 그래도 애는 애라니까, 라는 생각을 하며 그의 머리를 툭툭 치며 깨웠다. 어차피 이치로의 시야도 잘 안 보이겠다. 조심히 대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 뭐야... 형아랑 축구하고 있었는데... 헉, 뭐야! 산타?!"
얼씨구.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진 녀석의 표정이 볼만했다. 막내는 산타를 안 믿는 것 같았는데, 이 녀석은 믿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신기하다는 듯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이치로가 분장한 루돌프에게 시선을 돌리자 깜짝 놀란 표정을 한 채 루돌프에게 다가갔다.
"헉! 진짜 루돌프야?!"
루돌프의 뿔을 만지작거리며 헤헤 웃는 게, 누가 봐도 유치원생의 순수함이라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뿔을 만지면 유치원생이더라도 가짜라는 걸 알아챌 텐데 이 녀석은 바보처럼 그저 신기해했다. 조금은 뿌듯했지만, 그래도 귀찮으니 빨리 선물을 줘야지.
"호호호. 메리 크리스마스. 착한 일을 한 아이에게 주는 산타의 선물이랍니다."
영혼 없이 뱉어낸 말이었지만 이 녀석은 좋다며 선물 상자를 받았다. 신난 나머지 루돌프라고 착각한 이치로에게 말을 걸고 있다. 착한 일 해서 산타에게 선물을 받았어! 등등의 영양가 없는 말이었다. 왠지 길어질 것 같은 느낌에 귀찮아져 다시 한 번 그에게 말을 걸었다.
"착한 어린이는 빨리 자야지. 선물은 아침에 봐도 늦지 않아요."
그러자 이 녀석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침대에 누웠다. 잘 자라는 형식적인 말을 한 후, 지로의 방에서 나왔다. 나오자마자 답답했다는 듯 루돌프 복장을 벗어 던진 이치로는 행동과는 다르게 뿌듯하다는 표정이었다. 그에 상관없이 땀에 젖은 이치로는 볼만했지만 말이다.
"어때요? 우리 지로 너무 귀엽지 않아요?"
"아, 그래.."
"이제는 사부로에게 가요."
다시 루돌프 분장을 한 이치로는 사부로의 방으로 기어갔다. 다시 한 번 말하는 거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씰룩거리는 이치로의 엉덩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다가, 노란색 포장지로 포장된 상자를 들고 사부로란 녀석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까의 녀석과는 다르게 이불을 제대로 덮은 채 꽤 얌전하게 자고 있다. 머리를 툭 치며 깨우자 천사같이 자던 얼굴이 찡그려졌다.
"..자는 사람을 왜 깨워.. ....이건 뭐야."
아까와는 온도 차가 너무 다른 거 아니냐. 짜게 식은 녀석의 표정에 이치로를 바라봤지만, 앞이 안 보이는 이치로에게 사부로의 표정이 보일 리가 없었다. 이후 사부로의 표정은 짜증에서 측은함으로 바뀌었다. 뭐야, 왜 그런 얼굴로 쳐다봐.
"와, 산타다. 신난다."
"...아, ㅅ... 호호호. 메리 크리스마스. 착한 일을 한 아이에게 주는 산타의 선물이랍니다."
"우와- 정말 감사해요."
이 말을 뱉는 나도 영혼 없는 말투지만, 사부로라는 녀석의 말에도 영혼이 없었다. 이치로가 루돌프로 분장했다는 걸 알고 일부러 말만 저렇게 하는 게 분명했다. 왜냐면 선물을 받는 그 순간마저도 녀석의 표정은 하찮은 것을 바라보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와아. 너무 신기한데, 혹시 사진 찍어도 될까요?"
"산타 할아버지는 지금 너무 바빠서 그만 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러지 말고 기념사진으로 찍게 해주세요."
결국 루돌프 분장을 한 이치로와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표정은 언제부터인지 아예 비웃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젠장, 짜증 나. 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치로는 열심히 루돌프 흉내를 냈다. 야, 발 든 것처럼 손 들지 마. 신난 척하지 말라고.
"그러면 안녕히 가세요. 전 자야 하거든요."
"사부로 군,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산타의 사진을 퍼트리면 안 돼요."
"알아서 할게요."
아 진짜 뭣 같다. 최대한 입가를 비틀어 올린 채 그의 방에서 나왔다. 답답했다는 듯 루돌프 복장을 벗은 이치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 뒤 씩 웃었다. 사마토키 씨 덕분에 지로와 사부로에게 메리 크리스마스가 됐을 거라며 낮게 읊조렸다. 허, 아까의 녀석은 아닌 것 같던데.
"어때요? 우리 사부로 너무 귀엽지 않아요?"
"하, 너는.."
"사마토키 씨, 많이 힘들었나 보네.. 얼굴이 반쪽이야."
"...하. 너, 내일 외박한다는 약속 꼭 지켜라."
당연하죠! 자신에게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이치로 때문에 화가 조금은 풀렸다. 손톱만큼이지만.
"나에게 산타 분장을 하게 만드는 건 너뿐일 거다."
"당연하지.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시키면 거절해야 해요?"
"시키는 사람의 목이 날아갈 거라고는 생각 안 하나 보네."
이치로의 코를 약하게 꼬집어준 후 그가 방에 들어가게끔 유도했다. 이제 새나라의 어린이인 너도 잘 시간이야. 이치로가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고 거실 소파에서 잠을 자려고 하자 이치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가세요?"
"소파 말고는 잘 곳이 없잖냐."
"왜 없어요! 제 옆에서 자면 되잖아요!"
허, 누굴 범죄자로 만들려고? 이치로에게 꿀밤을 먹이고 뒤돌아서 거실 소파에 누웠다. 하여간, 요즘 애들이란. 발랑 까졌다니까.
-
"사마토키 씨, 일어나서 밥 먹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깨워주는 건 여전히 기분 좋은 일이구나. 눈을 뜨자 앞치마를 두른 이치로가 자신에게 웃어주고 있었다.
"잘 잤냐."
"당연하죠. 사마토키 씨도 잘 잤나보다."
이 녀석과의 동거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아침마다 저 해맑은 얼굴을 보면서 깨고, 아침에 일어나서 얼굴 맞대며 밥 먹은 뒤, 누가 먼저 집을 나서든 간에 뽀뽀해주며 배웅하는 삶. 이러한 감성적인 생각에 빠져 이치로에게 키스하려는 그 순간,
"형아!! 케첩이 안 보여!"
"형이 찾아줄게!! 그러면, 빨리 씻고 밥 먹으러 나와요."
딱 키스할 타이밍이었는데. 젠장! 한숨을 푹 내쉬며 욕실로 향할 때도 여전히 따가운 시선이 따라왔다. 재빨리 욕실에 들어와 세수하며, 어제와 같은 상황이 반복될 것을 상상하니 끔찍했다.
예상한 대로 자리에 앉아 밥을 먹는 상황이 어제 점심과 저녁의 상황과 비슷했다. 데자뷰냐고. 산타에게 선물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지로라는 녀석과 묘하게 자신을 보고 비웃는 사부로라는 녀석의 모습이 대조되었다.
"사부로는 어땠어?
"제가 원했던 보드게임이어서 너무 좋았어요."
"정말? 좋았겠네~"
"산타가 낯익은 얼굴을 가져서 좀 놀랐지만요."
저거, 지금 나 놀리는 거 맞지? 참자. 참아야지. 10살도 더 차이 나는 녀석에게 욱해선 안 된다. 불편한 아침 식사가 끝나고, 집으로 갈 준비를 끝내자 두꺼운 야상을 들고나온 이치로가 현관까지 따라왔다.
"이것도 걸치고 가세요! 감기 걸리면 안 되니까요!"
"이게 내 몸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치로에게 겉옷을 받은 후 그에게 대답을 해주는 대신 제 볼을 톡톡 두드렸다. 처음에는 물음표를 띄우고 순진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이치로는 드디어 이 신호를 알아차렸는지 뺨을 긁적였다.
"부끄러운데."
"어허, 어서 해야지. 누구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치이-"
천천히 다가온 이치로는 내 뺨에 볼 뽀뽀를 해준 후 떨어졌다. 이젠 만족하냐는 물음에 기습으로 이치로의 입술에 입 맞추는 것으로 답했다.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진 모습이 볼만했다. 귀엽긴.
"반칙이야, 그거..!"
"반칙은 무슨. 좋아 죽겠다는 표정인데."
"정말.. 아, 맞다! 갑자기 사마토키 씨가 놀라게 하는 바람에 까먹었잖아요!"
"뭘?"
다시 집으로 들어간 이치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재빠르게 나오는 모습을 보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저 자식, 넘어지면 어쩌려고 저렇게 급하게 나와? 하지만 이치로가 보자기에 싼 무언가를 자신을 향해 내밀자, 당황스러움이 더 커졌다.
"이건 뭐냐?"
"음식이에요! 대충 아무거나 때우지 말고 저녁에 이거 먹어야 해요! 자기 전에 검사할 거예요!"
"허, 그래. 오냐."
"헤헤, 맞다! 사마토키 씨, 메리 크리스마스!"
"너도."
오늘따라 예쁜 말만 뱉는 이치로의 입술에 다시 한 번 입 맞췄다. 입술을 떼어내자마자 얼굴을 가린 채 민망해하는 이치로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이제 정말 간다. 이치로의 집에서 나와 내 집으로 차를 모는 동안 머릿속으로 내일 뭘 해야 할지 고민했다. 평소처럼 보내기는 아까울 테니까.
(외전)
"산타는 내가 원하는 선물을 어쩜 이렇게 잘 아는 거지?"
너무 읽고 싶지만, 한정판 품절이라 사지 못하는 라노벨에 대해 형에게 한탄했을 뿐인데! 기가 막히게 딱 원하는 선물을 가져다준 것에 대해 감탄했다. 산타는 어떻게 한정판을 구한 거야! 지로는 라노벨을 소중히 책꽂이에 꽂아둔 후 방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듯 무언가가 끓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지로는 이치로를 돕기 위해 부엌으로 가려고 했지만, 눈앞에 서 있는 사부로 때문에 발걸음을 멈췄다.
"야."
"아, 왜."
"야, 저능. 너는 아직도 산타를 믿냐?"
"하? 못 믿을 것도 있냐? 어제 봤잖아. 너도 본 거 아니었어?"
그 사람, 아오히츠기 사마토키인데. 사부로의 말을 듣자마자 지로의 동심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럴 리가 없다며 현실부정을 하는 지로를 본 사부로는 한껏 비웃어주었다. 이에 약이 올랐는지 소리를 빽 지른 지로는 그런 녀석이 왜 해줬겠냐며 소리를 바락바락 질렀다.
"야, 갑자기 소리 지르면 이치 형이 놀라잖아. 조용히 해."
"무슨 근거로 그 녀석이 산타 분장을 했다는 거야!"
"이 사진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려나."
지로의 얼굴 쪽으로 사부로가 자신의 휴대폰을 들이밀자 산타와 루돌프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익숙한 얼굴이긴 한데.. 백발에, 적안. 적안?!
"..진짜냐?"
"아직도 산타가 진짜로 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씨, 기분 나빠. 선물도 그 자식이 준비한 거야?!"
"그럴 리가 있냐. 우리 취향을 잘 알고 준비할 사람이면 이치 형 말고 있을 리가 없잖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지로를 쳐다본 사부로는 휴대폰을 다시 회수했다. 이 사진으로 이치 형과 헤어지라고 협박을 해볼까. 그러지 않으면, 기자에게 폭로해서 더티톡의 아오히츠기 사마토키! 그 나이 먹고 산타 코스프레?! 라는 기사를 쓰게 하겠다고 말하는 거야.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루돌프 코스프레를 한 이치 형이 너무 귀엽다. 이걸 남에게 보여주기 좀 그렇지. 사부로가 먼저 밝히지 않는 이상 루돌프 탈을 쓴 이치로를 알아볼 사람은 없겠지만 사부로에겐 알 바가 아니었다. 사부로는 이치로가 있는 부분만 자른 뒤, 원래의 사진은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이 휴지통으로 보내기를 눌렀다.
"얘들아, 밥 먹자!"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은 지로와 휴대폰의 사진만 바라보던 사부로는 이치로의 목소리에 빠르게 부엌으로 달려갔다. 직접 구운 듯한 치킨과 케이크가 보였다. 재빠르게 자리에 앉은 두 동생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이치로는 입을 열었다.
"지로, 사부로. 메리 크리스마스."
"응! 메리 크리스마스!"
"이치 형도, 메리 크리스마스!"
"야! 사부로, 나는?!"
"내가 왜 널 생각해줘야 하는데?"
결국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되자 이치로는 한숨을 쉬며 둘의 싸움을 중재했다. 좋은 날에, 형제끼리 싸우면 안 되는 거야. 한숨을 쉬다가도 이내 웃음을 터뜨린 이치로는 내일의 외박을 위해 운을 뗐다.
"지로, 사부로. 내일은 내가 온종일 들어올 수 없는데 둘이서 싸우지 않고 있을 수 있지?"
"헉, 왜?! 내일 바빠?"
"더티톡의 일 때문인가요?"
"그건 아니고, 사마토키와 약속했거든."
뭐라고. 둘의 눈에 한순간 스파크가 튀었다. 이치로는 케이크를 잘라서 동생들에게 주느라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후 이치로는 깨작깨작 먹는 지로와 사부로를 보고 걱정하듯 말을 건넸다.
"애들아, 혹시 맛없는 건 아니지?"
"아냐!! 맛있어!"
"그럴 리가요!"
"평소보단 잘 못 먹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이치로가 걱정하지 않도록 평소처럼 먹다가, 지로와 사부로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일, 절대 형아를/이치 형을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돼. 오랜만에 동지가 된 두 사람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